시즌 2. 망국의 왕자 12. 위대한 목적

오상준
2018-05-03
조회수 481

12. 위대한 목적


기나긴 세월이 지났다. 거듭된 전쟁에서 루흐다 유전자와 결합한 지적 생명체 중 인간의 후예들을 이길 자들은 없었다. 일상화된 외계 종족과의 전투는 이 이나스 제국의 백성들을 계급으로 갈라놓고 서서히 진화시켰다. 루흐다의 형질을 가진 자들은 전투에 최선봉을 서면서 전문 무사가 되어 황가에서 발탁된 엘로이 계급이 되었다. 이들은 사이오닉 기어로 더욱 증폭된 전투능력을 토대로 강력한 파괴력을 발휘했다.

 반면 산업 전반에 활동하던 평민들의 후예는 기어스라는 계급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들은 엘로이처럼 루흐다인의 성질이 분명하진 않았지만 오랜 사이오닉 기어를 착용으로 약간의 외형 변화가 생겼다. 그러나 이나스 황가의 제후들은 끝까지 사이오닉 기어를 착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힘을 원했을뿐 루흐다인과 동화되길 바라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순수한 인간의 외형을 남긴 이들은 제후들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루흐다인의 후예가 되는 후보로써 인간의 우월성은 루흐다인들을 상대로 연전 연승하여 하나 둘 멸망시켰다. 애당초 플래닛들이 정한 룰에 따라 루흐다인의 형질을 얻은 다른 종족들과는 대화가 불가능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유일한 수단은 전쟁뿐이었고 인간의 폭력성은 그런 면에서 아주 적합했다.

 마침내 700여년의 세월이 지났을대 플래닛들이 대결했던 이 척박한 행성 아레나에는 이나스 제국과 단하나의 야만인 세력만이 살아 남았다. 전쟁은 이때부터 고착상태에 빠졌다. 상대방의 세력이 만만찮은 면도 없진 않았다. 그러나 권력을 지닌 제후들이 일부러 전시 상태를 유지하려고 했던것이 결정적이었다. 제후들은 그들이 건국때부터 누린 불사와 더불어 자신들의 권력을 헤치는 아주 작은 변화에도 민감했다. 전쟁은 그들의 일상이었고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물론 그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카일러미아에 대한 비밀도 한가지 이유였으나 기나긴 세월이 이 경험을 아득하게 만들어 제후들조차도 일종의 전설처럼 치부하는 사소한 이야깃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 무렵, 한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란성 남매 쌍둥이로 어머니는 레비 아간 여제였고 아버지는 제후들 가운데 하나였다.

 여제의 자식들 중 남자 아이는 후보가 될 수 없었으므로 제후들은 황위계승청에 일러 남자아이를 죽을 것을 명령했다. 계승청은 계승청 소속 근위무사인 이얀 카눔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이얀은 이 임무에 익숙했다. 자격 미달인 계승자는 아수라의 가장 깊은 곳의 소각장에서 무사가 숨을 끊은 후 소각하는게 관례였다. 이 과정은 황위 계승청 사람들과 그들에게 선발된 근위 무사만 알고 있었으나 드문 일은 아니었다. 여제가 출산할 때마다 갓난 아아 중 남자는 그런 식으로 죽임을 당해 왔던 것이다. 이얀 또한 어떻게 여제가 후보를 출산하는지는 알지 못했으나 그는 이 일이 황가의 혈통을 이어가는데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 믿었다. 그러나 이 무렵 이얀에게는 한 가지 심적인 문제가 있었다.

 계승청의 시종이 이얀에게 갓난 아이 바구니를 전달하고 자리를 떠났다. 시종은 근위 무사들의 완벽한 일처리를 봐왔기에 굳이 살육의 장면을 목도할 마음이 없었다. 이얀은 자신의 검을 뽑았다. 아이의 바구니는 피로 얼룩진 제단에 놓여 있었고 그 앞에서는 소각로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찌된 영문일까. 칼끝을 아이에게 겨눈 이얀은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명령을 받들고 이 아이를 참해야만 했다. 그러나 도무지 팔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사적인 감정이 판단을 흐리고 있단 걸 안 순간, 이얀은 칼을 내려 놓았다. 평소라면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으나 도무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 이순간 그의 아내가 출산을 앞두고 있었다. 예후가 좋지 못했다. 의사는 아이의 건강이 나빠 출산 중 죽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의 아이가 위태롭게 태어나려는 이 순간에, 그는 이 아이를 죽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왜 자꾸 이렇게 마음이 녹아 내리는지는 깨닫지 못했지만 그는 할 수 없었다. 이전에 스스로가 했던 임무를 부정할 마음은 없었다. 그저 이번만큼은 내키지 않았을 뿐이다.

 이얀은 검을 도로 집어 넣었다. 이 아이의 처리를 잠시 유예하기로 했다. 그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때까지만 말이다.

 그는 아이 바구니에서 갓난 아이만 들어올리고 아이를 품속에 숨겼다. 아이는 울음소리 한번 내지 않았다. 아이의 그러한 태도에서 이얀은 강한 인상을 느꼈다. 속살 또한 다른 아이와 달리 단단했다. 문득 이 아이 이름이 떠올랐다. 금속처럼 단단한 피부를 가진 아이니까, 크롬이라고 하자. 비록 묘비명에 적을 이름이긴 하겠지만.

 이얀은 텅 빈 아기바구니를 소각로 속에 집어넣고 소각실을 빠져 나왔다. 그러면서 아무리 여제 폐하라도 그의 이러한 행동은 눈감아줄 거라는 엉뚱한 자기위안에 빠졌다.

 집으로 돌아온 이얀은 아내가 낳던 그의 아이가 결국 사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식을 잃은 슬픔도 잠시, 그는 자신이 크롬을 구한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정신을 차린 아내는 그에게 아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이얀은 자기도 모르게 크롬을 보여주었고 아내는 그 아이가 자신이 낳은 아이인줄 믿었다.

 이얀은 자신의 행동을 후외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목숨을 건진 기대에 부흥하여 크롬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전사로 자라났기 때문이었다. 그는 어릴때부터 천부적인 카리스마를 타고났고 모든 교육을 우수한 성적으로 완수하여 장래가 촉망받는 전사로 자라났다.

 그 동안 그의 이란성 쌍동이 여동생인 레인은 어머니의 뒤를 이어 여제로 등극했다. 크롬은 여제의 즉위 기념으로 아수라에서 열린 열병식에서 레인 여제를 처음 보았지만 자신이 남매 사이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수한 전사로 자란 크롬은 드디어 고대하던 전쟁터로 떠났다. 그는 엘로이 족의 존재 이유를 황가에 충성해 적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배워왔으며 황가를 의심하는 다른 의문은 감히 가지지 못했다. 그는 엘로이 족 전사들 가운데서 가장 충성스런 전사였으며 모든 전사들의 귀감이었다.

 크롬은 수많은 전투를 치르며 점점 명성을 드 높여갔다. 그는 전쟁기술을 천부적으로 구사하면서 적들을 패퇴시켰다. 전투에 능할 뿐만 아니라, 리더쉽도 뛰어났으며 전략가로서도 명망이 높았다. 한마디로 그는 전쟁과 관련된 모든 능력이 뛰어난 군사 천재였다.

 일개 병사로 시작한 크롬은 몇년이 지나 전사한 상관들의 자리를 채워 일개 군단의 장군으로 진급했다. 장군이 되기 직전, 그는 야만족들의 대병력을 격파하여 영웅이 되었다. 그때 얻은 별명이 바로 ‘철혈장군 크롬’이었다. 이제 야만족들과의 마지막 전투만 남겨두고 있었다. 그때부터 모든 이나스 제국의 엘로이 족들은 크롬을 칭송하기 시작했다. 그 인기는 계급이 다른 기어스족에게도 퍼졌고 황가의 제후들까지도 그의 이름을 알 정도였다.

 아레나 행성의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는 이나스 황가의 제후들은 크롬을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또한 엘로이족들 사이에서 그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었고 이는 엘로이족 군대를 지배해 권력을 유지해온 제후들에게 있어 위협적이었다.

 제후들은 크롬을 제거하기로 마음 먹었다. 제후들은 이 분야에 있어서는 오랜 경험으로 매우 익숙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반역자로 몰아 처형하는 것이었다. 수도가 아닌 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크롬에게 반역죄를 뒤집어 씌우기는 어려웠기에 제후들은 크롬이 아닌 그의 아버지 이얀을 이용해 가문 자체를 멸족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대승을 한 크롬을 대장군에 임명한다며 수도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크롬이 전장을 떠나 황궁 근처에 왔을때, 황위 계승청의 병사들이 크눔 가문의 집에 들이 닥쳤다. 크롬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이려던 늙은 이얀과 식솔들이 모두 체포되었다. 그날 시내에는 흉흉한 소식이 퍼졌다. 크눔 가문이 적들과 내통하고 있었고 황가를 위협하는 중대한 반역을 계획하다 발각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황위 계승청의 심문실에서 이얀은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용 없었다. 나중에 가서는 가족들 만큼은 풀어달라 사정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초죽음이 된 이얀은 제후들이 크눔 가문 자체를 없애려고 한다고 확신하게 됐다. 하지만 대체 왜? 하고 고민하던 이얀은 오랬동안 잊고 지냈던 사실이 생각났다. 그들이 크롬의 정체를 알아버렸구나. 곧 크롬도 헤치고 말겠구나. 반역자로 처형을 앞둔 이얀은 간수들로부터 크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크롬 또한 도성입구에 들어오자 마자 계승청의 병사들에게 체포 되었으며 황궁으로 압송되는 중이었다. 이얀은 계승청 간수에게 비밀리에 유언을 남겼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에게 줄수 있는 유일한 유품은 내 사이오닉 기어밖에는 없겠구나.


 몇 시간 후 이얀의 목이 수도 광장에 메달렸다. 그의 아내를 비롯한 가문의 식솔들 또한 모두 죽임을 당했다. 한편 영문도 모른체 압송되어 황궁으로 가던 크롬은 전선에서 소식을 듣고 그를 구하러온 그의 친위대에게 구출되었다. 이얀이 크롬에게 유언을 전해 듣고는 그의 사이오닉 기어가 어디에 있는지 조사했다. 계승청의 근위무사들이 퇴역할때 그들의 사이오닉 기어는 아수라의 심장부인 조정실로 가는 회랑에 명예롭게 전시되어 있었다. 크롬의 친위대는 호랑이의 입으로 들어가려는 크롬을 말렸지만 아버지의 유언에 분명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걸 직감한 크롬은 작전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계획대로 잠입에 성공하여 회랑에 있는 아버지의 사이오닉 기어를 걸쳤다. 

 홀로그램속에서  이얀은 크롬이 자신의 친아들이 아닌 오르데 예제의 아들이며 현재 레비아간 여제의 쌍둥이 오빠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얀의 아이가 죽자 그를 죽이지 않고 자신의 아들로 삼았음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아들처럼 사랑했다고도 이야기했다. 아버지의 유언을 듣고 눈물을 흘리고 있던 크롬 앞에 이수라에 잠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 친위대의 부장이 나타났다. 제후들은 그렇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제후들의 첩자인 부장이 크롬의 계획을 제후들에게 알렸고 아수라를 탈출하려던 순간 부장이 쏜 총에 가슴을 맞고 쓰러졌다. 제후들은 크롬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 안심하고 각자의 침상으로 돌아갔다.

‘여기가 어디지?’

하고 크롬은 눈을 떴다. 알길이 없었다. 전사가 죽어서 당도한다는 바하문이라는 사후세계인것 같았다. 사방이 모두 깜깜했고 어떤 빛도 없었다. 그때 빛 한줄기가 얼굴로 내리쬐였다. 크롬은 눈이 부셔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시야가 점차 뚜렸해지만서 형상화된 사람이미지가 홀로그램처럼 나타났다. 어느 소년으로 보였다. 전형적인 엘로이족의 모습의 격식있는 차림이었다. 소년이 그의 앞에서 절을 했다.


넌 누구지?


소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했다.


전 아수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당신의 동생인 레비아간님이 제 주인이시지요.


아!!! 하지만 난 총에 맞았고 죽었는데..


네 당신은 총에 맞았지만 제가 이곳 조정실로 모시고 왔고 엘릭서를 드렸지요. 

해서 지금은 살아계십니다. 간발의 차이로요.


엘릭서? 


크롬은 아직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을 하지 못했다.


네, 제가 주인에게 드리는 불멸의 영약이지만 어쩐 이유에서인지 제 주인들은 너무 연약하셨거든요. 

하지만 제 분석에 의하면 여태까지 제 열쇠들 중에서 가장 건강하고 강력하십니다.


열쇠?


크롬은 혼란스러웠다. 열쇠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수라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열쇠는 계약자를 뜻합니다. 제후들의 시스템에서는 여제라고 하지요. 물론 당신은 아직 열쇠가 아닙니다. 계약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지만.

그리고 아수라는 무릅을 꿇고 절을 했다.


청이 있습니다.


청? 뭐지 네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겠네.


시스템을 무너뜨려 주십시요.


시스템?


이나스 황가와 제후들이 구축한 아수라 계승 시스템을 말하는 겁니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분은 크롬, 당신뿐입니다.


내.. 내가?


그간의 계약자들은 연약하여 행성 아레나를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었지요.

부디 다른 플래닛을  모두 파괴하고나서 ‘위대한 목적’을 이루어 주십시요.


‘위대한 목적’?


네. 당신이들 이곳에 온 목적, 이 행성을 정복해야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 그 목적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 목적은 계약자가 요청해야만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갑자기 체포되면서 생겼던 의문들이 모두 풀렸다. 왜 제후들이 자신을 죽여야만 했는지 이해가 갔다.


어떻게 하면 열쇠가 될수 있지?


원래는 계약자가 이어받을 계약자를 정하고 자신의 열쇠 신분을 포기하거나,

부득이하게 죽은 경우는 제일 먼저 시스템에 연결된 계약자가 열쇠가 됩니다만,

당신은 계약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으셨지만 남성이라 적합도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실망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쌍동이 남매이신 레비아간 여제와 협력하시면 승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아수라는 과거 위원회가 이나스 황가로 변모하면서 벌였던 추악한 짓들을 크롬에게 보여주었다. 첫 계약자가 아수라라는 이름을 준 순간부터 지금은 제후들이 된 위원들이 벌인 일들 중 아수라가 기록할 수 있었던 영상이었다. 마땅히 무사이자 군인으로서 충성을 다해야 한다고 여겼던 황가의 제후들이 그렇게 사악하고 추악한 무리들이었다니 그리고 제후들에게 착취당했던 그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부터 잔혹한 욕망의 희생양이 되어왔던 하나뿐인 친 혈육인 쌍동이 누이까지 생각이 미치자 크롬은 화가 치밀어 올라 경악을 금치못하고 쓰러졌다.

크롬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곳은 그의 집이었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지금까지의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가슴에 난 총상으로 뚫어진 옷과 그 안에 아무런 상처도 없는 자신의 가슴을 거울에 비춰보고 그제서야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크롬은 모든것을 바로잡기로 결심했다. 아니 비록 바로잡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싸울것을 맹세했다.

 크롬은 이나스 제국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그는 변장을 한 상태로 과거 자신을 흠모했던 여러 군대의 지휘관과 만났다. 지휘관들은 크롬이 살아 있다는 것에 크게 놀랐고 크롬은 자신의 목적을 굳이 숨기지 않고 이야기했다. 그는 아수라와 교감을 나눈 이야기를 하면서 엘로이족 지휘관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들은 늘 전쟁을 끝내기는 커녕 승리의 목전에서 늘 퇴각을 명했는지. 왜 아수라를 통솔하는 여제는 황가의 제후들에 의해서만 움직이는지. 이 질문들은 엘로이족 전사들이라면 누구나 품었던 것이었고 크롬은 사이오닉 기어의 영상을 보여줌으로 그들의 신뢰를 얻어냈다. 게다카 크롬 특유의 솔직한 카리스마가 작용에 크롬에 동조하는 엘로이족은 급속도로 늘어갔다. 이나스 황가의 압정을 목격해온 전사들에게는 크롬은 희망의 상징이 되어갔다.

 반역을 제압한 제후들은 체제정비를 위해 레인 여제의 1주년 즉위를 기념하여 전선에서 군을 불러들여 사열시키고 지휘관을 교체했다. 크롬은 과감하게 열병식에 나서는 전사들 속에 숨었다. 그와 같이 열병식에 나선 전사들조차도 그가 크롬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새로 임명할 지휘관의 이름을 부르자 단상으로 지휘관이 나오다 갑자기 칼을 뽑아들고 제후들을 호위하던 근위무사들을 베기 시작했다. 근위무사들은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당황하며 피를 흘리며 쓰러지자 제후들은 놀라 뒤로 물러났고, 그 지휘관이 투구를 벗고 얼굴을 내놨다. 제후를 호위하고 있는 크롬의 부장이었던 근위무사가 소리쳤다.


크, 크롬이다!


제후들도 뒤걸음을 치며 겁에질려 모두 소리를 질렀다.


반역! 반역이다!

크롬이 반역을 일으켰다!


그때 사열대를 이끌던 장군들도 다가와 칼을 뽑았다. 여제와 제후들을 호위하던 근위 무사들은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고 장군들속에서 크롬이 소리쳤다.


장군들이여, 무기를 버린 자들은 죽이지 마라. 

우리는 제후들로부터 전사들을 해방시킬 것이다.


크롬은 전장에서처럼 일사불란하게 반란군을 지휘했다.


여제를 보호하라!


크롬은 사이오닉 기어를 통해 아수라에게 부탁을 했다. 레인에게 모든 것을 설명해달라고, 그러자 몸에 전류가 흐르는 듯 여제는 움찔거렸고 크롬에게 휘둥그레 시선을 보냈다. 마치 생전 처음으로 호의를 받은듯, 그녀의 빰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여제를 안심시키자, 크롬은 장군들과 함께 다시 제후들에게 다가갔다. 저들을 발 밑에 둘 차례였다. 그들이 아수라가 알려준 것 말고도 어떤 진실을 숨겨 왔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파헤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근위무사들은 크롬이 다가오자 점점 허물어졌다. 그들은 급기야 파도가 갈라지듯 크롬의 앞길을 비켰다. 이제 제후들과 크롬 앞은 불과 몇 발자국 사이, 장군 가운데 하나가 말했다.


새로이 황제가 되실 분에게 경의를 표하는게 좋을 것이다.


 그 말 한마디에 제후들은 앞다투어 무릅을 꿇었다. 700여년을 지탱하던 이나스 황가는 그렇게 무너졌다. 제후들은 크롬에게 굴복했고 그날부터 크롬은 아수라를 비롯한 제국의 전권을 차지했다.

 크롬은 제후들이 금역으로 지정해온 아수의 중심부에서 한동안 황가의 치부를 파악하고 이를 응징하는데 몰두했다. 크롬은 황위 계승시스템이 유지되었던 모습을 직접 목도했고 큰 분노에 빠졌다. 몇몇 제후들은 직접 죽여 본보기로 삼고 그들이 공포속에서 복종하도록 만들었다. 황위 계승청은 폐쇄되었으며 계승청의 굴레에 있던 어린 계승자 후보들은 크롬의 보호하에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제후들을 모두 참살하고 싶었으나, 크롬은 그들이 가진것들중 아수라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해서 열명의 제후들만 내시로 만들고 계약자들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일을 보게 하였다. 크롬은 그들에게 더 이상 엘릭서를 여제에게 갈취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미 레비 아간 여제는 몸이 너무 쇠약해져 있었다. 그렇게 크롬은 제후들에게서 필요한 것만 전수하고 늙어서 죽도록 했다.

 크롬은 레인 여제의 간청에 따라 그녀를 폐위시키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계약자는 여성만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기존의 계약자 후보들 사이에서 계약자가 될 새로운 황후를 맞이하는 수 밖에 없었다. 크롬은 그녀를 끝으로 기존의 황위 계승 시스템은 막을 내릴 것이며 앞으로 그의 자손들 중 황후나 공주가 계약자의 자리를 이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즉 황위의 후보자는 그 아들이 아닌 자격있는 엘로이 전사 중 하나로 채택한다는 뜻이었고 모든 엘로이족의 지지를 얻으려는 의도이기도 했지만 황제자리로 대표되는 권력의 세습은 크롬이 바라지 않는 일이었다. 이미 제후들의 추악함을 목격한 그로서는 자신 또한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황제 자리에 어울리는 가장 강인한 전사에게 그에 맞는 자리를 주는 것이 합당했다.

 대관식을 끝낸 크롬은 레비아간과 아수라를 만나러 기둥으로 갔다. 기둥의 매뉴얼에 적혀 있던 카일러미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새로운 제국을 세우는데 바빠 미처 신경쓰지 못했지만 크롬은 그것을 눈여겨 봐두었다.


좋습니다. 크롬, 당신이라면 ‘위대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군요.


크롬은 이제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수 있는 자격이 있었다. 그는 아수라의 대답을 기다렸고 아수라가 형상을 지어낸 소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아수라가 기둥에 빛을 띄웠다. 기둥에 쓰여진 글씨들이 크롬에게 드러났다.


여기 쓰인 대로입니다. 당신들은 애당초 그곳으로 가기위해 계약했습니다. 

카일러미아로 가서 당신들에게 능력을 부여한 이 유전자의 원주인, 

루흐다인들과 영광스러운 유산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크롬은 무언가 새로운 목적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물었다.


카일러미아는 어떤 곳이지?


낙원이자 당신들의 최후 안식처입니다. 

그곳에서는 어떠한 생명 장치 없이도 정착해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과거 당신들의 조상들이 떠난 지구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수라가 행성의 풍경들을 허공에 띄웠다. 그들의 둘레로 자연 영상들이 펼쳐졌다. 크롬은 그것에 매료되어 주먹을 쥐고 서 있었다. 저 아름다운 세상으로 가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면, 그 목적을 달성하고서 더는 싸울 이유가 없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크롬이 물었다. 저긴 어떻게 가면 되지?


아수라가 조언했다.


이 기둥에 쓰여있는 룰을 지키면 됩니다. 

당신에게 대적하는 다른 야만인들을 모두 제거하는 겁니다. 

그것이 카일러미아로 가는 좌표를 획득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참 간단한 방법이군.


크롬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전쟁은 그가  가장 자신있는 분야였다. 황제 크롬은 즉각 야만인들을 멸망시키키 위한 대규모의 군사 작전을 몸소 지휘했다. 그는 계약자인 레비 아간이 남매인 크롬에게 마지막 전쟁을 도울 수 있게 해달라는 간청에 그녀로 하여금 아수라를 친히 전략적인 거점으로 움직였다. 이것은 새로운 전술이었다. 그 동안 아수라는 철저히 방어에만 사용되어 왔다. 이 전술에 권력을 잃은 제후들은 경악해씾만 크롬에게 복종하는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전투’라 불리는 전투가 임박했다. 결코 최후의 전투는 아니었지만 전설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 전투에서 크롬은 친히 황제를 상징하는 새로운 전신 갑주를 입고 나타나 선봉에 섰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전사들앞에서 작전을 친히 설명했다. 자신을 미끼로 야만인들의 주력을 유인하여 함정에 빠트린 후, 적의 모함을 포획하는 대담한 작전이었다. 그 작전의 대담함에 모든 전사들이 몸을 떨었고 크롬은 그들 앞에서 카일러미아로 가는 전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모두들 어리둥절해 했다. 일상적인 전쟁 때문에 아무도 그런 꿈을 꾼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크롬은 아수라가 보여준 카일러미아의 아름다운 홀로그램 영상을 공개했다. 전사들은 그제서야 크롬의 뜻을 알았다. 그들의 황제가 어떤 것을 원하는 지도 알게 되었다. 그는 계속된 전쟁이 아니라 그걸 끝내길 바라고 있었다.


그곳의 이름은 카일러미아라고 한다. 

우리의 일부분인 이들이 우리에게 약속한 세상이다.

나는 그래서 우리의 새 제국명을 카일럼으로 짓고자 한다. 

우리는 카일럼인으로서 우리의 진정한 조상인 루흐다를 계승하여 예정된 낙원에 반드시 도착할 것이다. 

그곳으로 가는 좌표를 얻기 위해서는 저들을 이곳에 잠재워야 한다.


크롬은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여기까지 온 목적이다. 

낙원은 바로 우리들의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곧 카일러미아의 운명이 될것이다. 

모두들 행을 빈다. 살아서 만나기를, 

죽은 이들은 바하문에서 우리의 앞날을 축복해 주기를.


 전쟁은 카일럼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야만인들의 플래닛을 탈취하였고 카일럼의 아수라가 아레나를 정복하게 되었다. 하지만 레비아간은 자신이 그곳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비아간은 마지막 영광스러운 일을 하고 죽을 수 있게 해달라는 간청을 크롬은 별수 없이 승낙했고 아수라는 카일러미아로 가는 좌표를 활성화시켰고 이제 카일러미아로 떠날 일만이 남았다. 황제 크롬은 엘로이족과 기어스족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가져다 줄 안식을 이야기했다. 일부는 계속 반신반의했지만 대다수는 크롬의 말을 완전히 신뢰했다. 그러나 다음 계약자를 정하지 못하면 카일러미아로 출발할 수 없었다. 

 이제는 황궁의 내시로 전락한 제후들은 이번 계약자의 선정이 그들의 목숨을 담보할 유일한 기회였다. 그들은 크롬과 사이가 나빠질수 있는 후보를 제공해야 했다. 그래야만 그들에게도 기회가 생길테니까. 그레이스 레인 계약자 후보는 발군의 신체 조건으로 이전의 제후들이라면 절대 계약자로 선정하지 않았을 후보였다. 내시들의 간계에 의해 엘릭서의 갈취를 최소화 한 후보였고 그는 엘로이족 전사들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그레이스 레인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다른 계약자 후보들은 너무 신체가 쇠약하여 장기간의 성간 여행에서 아수라를 맡기기 힘들어 보였다. 

 내시들은 그레이스가 계약자가 되면 그녀가 사랑했던 엘로이족 전사가 차기 황제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되며 자신들이 다시 권력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었다. 크롬도 그레이스를 처음 보고는 다른 계약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함께 새로운 카일럼의 황후로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또한 황제가 원하면 계약자들은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레이스 레인은 자신의 운명에 괴로워하며 연일 혼인의 승낙을 미루고 있었다. 크롬은 내시들의 간계를 눈치 채고 엘로이 전사를 잡아 들였다. 그레이스는 자신은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크롬과의 혼인을 승낙했다.  그레이스는 자신에게 모든 백성의 명운이 걸려있음에 슬퍼하며 운명을 받아들였다.

 마침내 이주준비가 완료되었다. 카일럼 제국은 주저없이 아수라와 마지막 야만인들로부터 포획한 플래닛에 모든 백성들을 태우고  카일러미아로 떠났다. 카일러미아로 도착하는 그 십여년간의 여정동안 크롬 황제는 운명이 정해준 곳으로 도착한다는 꿈에 기대어 도착할 날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레이스의 마음이 자신에게 향하도록 애타게 기다렸다. 그리고 그둘 사이에서는 카일럼의 첫번째 공주인 레나 크롬이 태어났다. 카일러미아에 도착하자 내시들은 반역을 획책하다 크롬에게 발각되자 엘로이 전사에게 죄를 뒤집에 씌웠다. 크롬도 반역의 씨앗을 남겨둘수는 없었다. 내시들의 적극적인 간언에 엘로이 전사는 처형당했다. 내시들이 살아남기 위해 그의 입을 영원히 다물게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크롬에게 질투의 대상으로 반역의 씨앗으로 생각되었고 그레이스는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크롬은 카일러미아에 먼저 도착해 있는 가이아와 에르시온에게 복종을 강요하며 자신이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제왕으로 타락할 줄은 꿈에도 모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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